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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가 인상 협조 요청의 件
“최근 2026년 2월 28일 개시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국제 유가 상승과 국내 원유 수급에 차질이 생기며 원재료 가격이 상승했습니다. 당사는 고객사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인상분을 최대한 흡수하려 하였으나…”
이제는 인상 공문이 와도 놀랍지도 않습니다. 3개월간 너무 많은 인상 공문을 봐와서 한 문장만 봐도 다음 문장이 자동으로 완성됩니다.
유가보다 더 무서운 것?
이번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시장을 강하게 흔들었습니다. WTI는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고, 환율은 1,500원을 넘나들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석화사들은 나프타 수급 불안과 환율 상승을 이유로 PE·PP 등 주요 석유화학 제품의 단가 인상을 이미 통보하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곧바로 필름·테이프·완충재·포장부자재 업체들로 번졌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번에는 시장의 움직임과 공문의 속도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국제유가가 먼저 오르고, 석화사 공문이 나오고, 이후 2차 가공업체들이 눈치를 보다가 순차적으로 인상 공문을 보내는 흐름이었다면,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WTI가 오르자마자 석화사 공문이 나왔고,
석화사 공문이 나오자마자 필름 업체가 움직였고,
며칠 뒤에는 테이프·완충재·부자재 업체들까지 동시에 인상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공급사들도 “조금 더 지켜보자”가 아니라,
“일단 먼저 이야기하고 보자” 태세로 전환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2026년 대단가인상 시즌이 개막하였습니다.
게임은 시작되었습니다. 구매담당자들은 키보드와 계산기를 붙잡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진짜 오른 게 뭔데요?”
#1. “원료가 올랐습니다.”
→ 정확히 어떤 원료가요?
공급사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은 아마 이것일 겁니다.
“원재료 가격 상승으로 인해…” 굉장히 편리한 문장입니다.
유가도 넣을 수 있고,
환율도 넣을 수 있고,
미래 불확실성도 넣을 수 있고,
시장의 분위기도 넣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능한 구매담당자라면 여기서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떤 원료가 얼마나 올랐는데요?”
예를 들어 PE Film 업체라면 최소한 다음 정도는 봐야 합니다.
- 국제유가(WTI, 브랜트유, 두바이유)
- 나프타 가격
- 에틸렌 가격
- HDPE/LDPE/LLDPE 시황
- 환율
- 국내 석화사 공문
실제로 이번 전쟁 이슈 이후 일부 필름 업체들은 25~40% 수준의 인상 요청을 보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내용을 뜯어보면 재밌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가는 급등했으나, 아직 기존 원료 재고를 사용 중인 경우.
환율은 올랐지만 이미 선매입 계약을 체결한 경우.
석화사 공문이 나온 직후, 시장 분위기가 급격히 과열되며 원재료 상승분 이상으로 인상률이 확대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공급사 입장도 이해는 됩니다.
이번처럼 유가·환율·원재료가 동시에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조금 더 지켜보자”가 매우 위험한 선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생산량이 많은 업체일수록 원료 매입 시점이 조금만 삐끗해도 엄청난 손실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LDPE Film은 호르무즈 봉쇄 이후 kg당 단가가 약 700원 정도 상승하였고, 연간 5천톤 단위로 원재료를 매입하는 업체라면 월 손익 영향이 거의 3억원 수준입니다.
- (연간 부담비용) 5,000,000kg/연간×700원/kg=35억원/연간
- (월평균 부담비용) 5,000,000kg/연간×700원/kg÷12개월≒3억원/월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한번 더 확인해야 합니다.
“현재 생산분 기준으로 실제 반영된 원가입니까?”
“언제 매입한 원료 기준입니까?”
“Index 연동 자료 공유 가능하십니까?”
왜냐하면 구매는 공포를 구매하는 조직이 아니니까요.

#2. “환율이 너무 올라서요…”
→ 정말 환율 때문입니까?
공급사 입장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의 단어는 아마 “환율”일 겁니다.
왜냐하면 환율은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뉴스만 켜도 나오고, 포털 메인에도 뜨고, 점심시간 대화 주제로도 등장합니다. 공급사 입장에서는 이보다 설명하기 좋은 인상 명분이 없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정보를 ‘공적정보(Public Information)’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잠깐!> 공적정보(Public Information) vs 사적정보(Private Information)
정보경제학에서는 공적정보와 사적정보의 격차가 커질수록 정보의 비대칭(Asymmetric Information)이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
그런데 여기서 꽤 흥미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분명 업체마다 상황은 모두 다른데, 정작 인상 공문에는 하나같이 같은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환율 상승의 압박으로 인하여…”
왜냐하면 설명하기 어려운 사적정보 대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공적정보를 전면에 내세우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공급사의 원가를 흔드는 요소들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 현재 어떤 단가의 원료 재고를 보유하고 있는지
- 원재료를 Spot으로 구매했는지, 장기계약으로 구매했는지
- 환헷지를 했는지
- 공장 가동률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 이번 인상으로 실제 얼마를 만회해야 하는지
이런 정보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환율”이라는 공적정보 하나에 실제 원가 상승분뿐만 아니라, 미래 시장 불안, 재고 리스크, 가동률 부담, 심지어 경쟁사의 인상 분위기까지 함께 섞여 들어가는 경우도 생깁니다. 실제로 실무에서는 “환율 상승”을 이유로 15% 인상을 요청했는데, 세부 내용을 확인해 보면 실제 환율 영향은 3~4% 수준이고, 나머지는 원재료 상승분이나 미래 리스크까지 함께 선반영 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결국 구매담당자가 조심해야 하는 순간은, 공적정보 하나가 너무 많은 사적정보를 덮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환율 때문에요…”라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적용 환율 기준은 언제입니까?”
“기존 재고는 어떤 환율 기준으로 매입하셨습니까?”
“현재 인상분 중 실제 환율 영향은 어느 정도입니까?”
왜냐하면 구매는 공적정보를 듣는 조직이 아니라,
공적정보 뒤에 숨겨진 사적정보를 읽어내는 조직이니까요.
#3. 우리는 공포를 구매하지 않는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었다고 해서 모든 업체의 원가가 똑같이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환율이 상승했다고 해서 모든 공급사가 같은 수준의 압박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는 실제 원가가 급등했고, 누군가는 미래 리스크를 먼저 반영했으며, 누군가는 시장의 분위기 자체를 가격에 섞어 넣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시장 상황이 너무 어렵습니다.”
실제로 어려운 것도 맞습니다. 유가도 흔들리고, 환율도 흔들리고, 원재료 시장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매담당자가 해야 하는 일은 그 공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인상이 실제 원가 상승 때문인지, 미래 시장 불안까지 함께 반영된 것인지, 공개정보 뒤에 어떤 사적정보가 숨어있는지.
우리는 결국 그 숫자 안에 들어있는 ‘진짜 이유’를 끝까지 확인해야 합니다.
왜 지금 시점에 인상을 이야기하는지,
왜 모든 업체가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하는지,
왜 어떤 업체는 5%를 이야기하고 어떤 업체는 30%를 이야기하는지.
그렇게 공급사의 인상 요청 공문을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이제 서서히 끝에 가까워진 느낌이 옵니다. 뭐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니까요.
“이번 인상 시즌도… 해치웠나?”
그 순간, 메일 알림 팝업이 화면에 뜹니다.
“단가 인상 협조 요청의 件”
…아. 또 시즌 시작이군.
※ 첨부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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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윽한 USB | 이재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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