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는 이미 그려졌고, 이제는 통로가 막혔다 지난 2월 칼럼에서 우리는 보조금과 조달 정책이 어떻게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거점을 옮기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삼성과 SK가 미국으로, ASML이 한국으로 향하는 현상은 ‘정책이 공급망의 물리적 지도’를 바꾼 결과였다.
하지만 2026년 3월 현재, 우리는 또 다른 거대한 변수에 직면해 있다. 중동의 전운이 짙어지며 호르무즈 해협과 홍해의 물류 마비가 장기화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정책 환경에서 물건을 생산해도, 그것이 적기에 도착할 수 없다면 그 공급망은 이미 붕괴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구매의 시선은 ‘어디서 만드느냐’를 넘어, ‘어떤 경로로 안전하게 오는가’라는 "안보 조달(Security-based Procurement)"로 이동해야 한다.
미국 FAR의 변화: ‘Buy American’을 넘어선 지정학적 실사 이러한 위기감은 최근 개정된 미국 연방조달규정(FAR)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2026년 초, 미 국방부(DoD)와 연방정부는 공급망 안보 강화를 위해 FAR Part 25를 전격 개정했다. 과거의 'Buy American'이 자국 산업 보호라는 경제적 논리에 집중했다면, 이번 개정의 핵심은 ‘지정학적 리스크 실사(Geopolitical Risk Due Diligence)’의 의무화에 있다.
이제 미국 조달 시장에 참여하는 기업들은 단순히 미국 내 생산 여부만 증명해서는 안 된다. 제품에 들어가는 핵심 전략 물자가 이동하는 '경로'에 적대적 영향력이나 분쟁 리스크가 없는지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이는 구매 담당자들에게 원산지 증명 이상의 고도화된 숙제를 던진다. 협력사가 텍사스에 공장을 두었더라도, 그 원부자재가 중동의 분쟁 해역을 거쳐 온다면 조달 적격성 평가에서 치명적인 감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 정부는 조달 정책을 통해 기업들에게 ‘안전한 동맹국 경로(Secure Alliance Path)’로의 이동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호르무즈 해협에 갇힌 ‘반도체의 숨통’, 희귀 가스 실제로 지금 중동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고 있는 품목은 반도체 노광 공정의 필수 자재인 네온(Ne), 크립톤(Kr), 제논(Xe) 등 희귀 가스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공급망 다변화의 대안으로 떠올랐던 중동 지역의 대형 제철소 부산물들이 지금은 오히려 거대한 리스크가 되었다.
글로벌 산업 뉴스에 따르면, 전 세계 선박 물동량의 약 20%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 위기에 처하자 희귀 가스 현물 가격은 불과 한 달 만에 300% 이상 폭등했다. 단순히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가스는 특수 컨테이너(ISO Tank)에 담겨 운송되어야 하는데, 운항 지연과 우회 항로 선택으로 인해 컨테이너 회전율이 급감하며 물량 자체가 씨가 마르는 ‘물리적 병목’이 발생했다. 구매 담당자가 아무리 우수한 협력사를 선점했더라도, 그 공급로가 전장에 막혀 있다면 생산 라인은 멈출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번 사태는 뼈아프게 증명하고 있다.
크랄직 매트릭스의 확장: ‘지리적 병목’의 등장 우리가 2월에 논의했던 크랄직(Kraljic) 매트릭스를 다시 꺼내보자. 기존 이론에서 병목(Bottleneck) 품목은 주로 ‘공급자가 적거나 기술적 난도가 높은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2026년의 구매 현장에서는 품목 자체의 특성보다 ‘운송 경로의 대체 불가능성’ 때문에 병목이 발생한다.
희귀 가스처럼 시장에 공급자는 존재하지만 경로가 차단된 경우, 이 품목은 크랄직 매트릭스 상에서 단순 ‘병목’을 넘어 기업의 사활을 결정짓는 ‘전략 품목’으로 격상된다. 구매 관리자는 이제 협력사의 재무제표보다 ‘지정학적 물류 지도’를 먼저 펼쳐야 한다. 단순히 저렴한 LCC(Low-Cost Country) 소싱을 고집하는 것은, 2026년의 전장(戰場) 같은 시장에서 스스로 보급로를 끊는 행위와 같다.
구매의 결단: ‘안전 프리미엄’을 지불할 준비가 되었는가 이제 구매 조직은 전략적 선택을 내려야 한다. 첫째, 운송 단가가 높더라도 중동을 우회하는 희망봉 루트나 북극 항로, 혹은 내륙 철도망을 확보한 공급사를 우선순위에 두는 경로의 다변화가 필수적이다. 둘째, 효율성(JIT, Just-in-Time)에 매몰되기보다 복원력(JIC, Just-in-Case)을 중시하며, 핵심 병목 구간을 통과하는 자재에 대해서는 ‘안전 재고’의 기준을 완전히 재산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책적으로 안정된 지역에 자체 생산 설비를 갖춘 공급자와 장기 계약을 맺는 "현지 조달화(Regionalization)"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구매는 이제 ‘공급망의 정보기관’이다 2026년의 구매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 정세를 읽고 위기를 선제적으로 감지하는 ‘기업 내 정보기관’에 가깝다. 미국과 일본이 왜 조달 문턱을 낮추며 동맹국 결속을 다지는지, 중동의 작은 분쟁이 왜 우리 공장의 가동 중단으로 직결되는지를 실시간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의 '최저가 경쟁'에만 매몰된 구매자는 변화의 파도 속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사실 구매는 늘 그래왔어야 했다. 다만 지금의 지정학적 위기가 그 본질을 우리 눈앞에 강제로 끌어다 놓았을 뿐이다. 공급망의 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보급로가 끊기는 시대, 구매 담당자의 판단 하나가 기업의 생산 라인을 넘어 국가 산업의 안보를 결정짓고 있다. 이제 구매는 단순한 비즈니스 기능을 넘어, 기업이 생존을 위해 휘두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력이자 최후의 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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