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직장에 있을 때, 이메일을 유관부서에 발송하고 나면 항상 캡처를 해두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메일함 용량이 적어서, 혹은 그 선배가 업무를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어서 캡처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내막을 알고 보니,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물이 나왔을 경우를 대비해 본인의 과실을 줄이고자 캡처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가령, Time Management 프로젝트를 협업할 때, 회신 기한을 명시하면서 중대한 의사결정은 유관부서에 맡겨버리는 식이였는데요. 프로젝트가 지연되었을 경우, ‘본인은 할 만큼 했다.'라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캡처를 한 것이죠.
물론 팀장은 팀 내에서 당신을 평가하고, 협력사는 시장 내에서 당신의 평판을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궁극적으로 “고객 만족”을 최우선순위로 두며 구매를 해야 하며, 여기서 “고객”은 우리에게 구매를 요청하는 부서(R&D, 마케팅), 우리가 구매한 것을 사용하는 부서(생산, 영업)입니다.
① 저는 팀장님의 Yes맨입니다. #구매 KPI에 올인
과거 유가는 선물이 마이너스(-)가 될 만큼 2020년 4월 급락했다가, 이후 2년 간 완만하게 우상향 하여 저점대비 약 3배까지 상승하였습니다. 실제로 배럴당 30~40불 하던 게 110불까지 올랐습니다. 1) 2020년에는 건드리기만 하면 모든 품목에서 단가 인하가 가능했지만, 2022년에는 모든 구매담당자들이 인상공문에 파묻혀 이례적으로 퇴사율이 높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미 많은 구매담당자들은 아시겠지만, 석유화학 산업의 특성상 업스트림 2) 제품의 가격은 다운스트림 3) 제품의 원가 구조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시장가격을 견인합니다.
쉽게 말해서 2022년에는 CPO(Chief Procurement Officer) 할아버지가 와도 인상을 막을 수 없는 시장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PS(PolyStrene) Sheet의 인상을 억제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인상을 해주지 않으면 공급을 중단하겠다는 업체 VS. 동결을 하지 않으면 결재를 안 해주겠다는 팀장님 사이에서 어버버 하다가 협력사 사무실로 찾아가서 수시간을 기다리고 미팅을 하고 나서야 겨우 Shortage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인상은 반영되었습니다.
당시의 제가 원가 절감(인상 억제)에 몰두한 나머지 자재 수급이 중단되었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생산 부서와 영업 부서에 돌아갔을 것입니다.
해당 칼럼에서는 양사의 비용 절감, 관리의 효율화를 위해 원료 MOQ, 생산 MOQ, 포장 MOQ, 물류 MOQ, 발주 MOQ를 협의하고 거래를 개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꼼꼼하게 협의를 해도 실제로는 협력사에서 생산 MOQ를 초과해 대량 생산을 하고, 물품공급계약이 만료되어 불용자재가 생기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여기 우리 구매팀에 아주 중요한 협력사 A가 있습니다. 협력사 A는 언제나 우리에게 우호적이며 장기간 거래한 믿을 수 있는 업체입니다. 따라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요. 어쩌다 보니 협력사 A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자 너무 많은 자재 α를 생산하여 계약 만료를 앞두고 과다한 재고가 남게 되었습니다. 협력사 A는 양사 관계를 언급하며 남은 재고의 일괄 매입을 요청합니다.
구매담당자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재고를 안 받자니 협력사 A와의 관계가 안 좋아질 것 같고, 재고를 받자니 자재 부서에서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본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이해관계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면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우리의 진짜 고객은 누구인가요?
현실적인 방법은 구매팀의 어려운 부분을 자재 부서에 피력하고, 허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추가 매입 수량을 산정한 뒤, 산정 수량을 근거로 협력사 A와 협상을 해야 하겠지만, 자재 부서와의 협의 없이는 협력사 A와 어떤 협상도 진행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며.
우리는 유관부서의 요청으로 구매업무를 시작하고, 유관부서의 만족으로 구매업무를 마무리합니다. 아무리 가격을 잘 맞추든, 협력사와 신뢰 관계를 쌓든 최종 수요 부서가 우리의 구매로 인해 불편함을 겪는다면 그것을 좋은 구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진심을 다해야 할 대상은 팀장도, 협력사도 아닙니다. 바로 내부고객입니다.